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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이야기

차이나는 클라스, 유홍준교수의 실크로드의 보물, 돈황을 찾아서.

by 속좁은펭귄 2020. 10.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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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도 유명한 유적지. 2018년 총 4차례에 걸쳐 답사 성공


답사인생 40년에 오랜 로망이었던 실크로드.

무엇보다 큰 결심이 필요한곳이라고해요. 최소 8박 9일 여정.


8시간 버스이동은 기본.


청춘들의 로망이 유럽 배낭여행이라면,  인생을 돌아보게 만드는 길이, 차마고도, 티베트, 실크로드에요.


대자연의 정취를 품은 땅.


실크로드 답사 전과 후. 자연을 인식하는 시각이 확실히 달라진다고함.


코로나 여파로 해외여행이 요원해진 요즘.  유홍준과 함께 떠나는 랜선 탐방.



대자연과 장구한 역사를 품은 땅.

인류 역사상 가장 의미있는 길인 실크로드.


그안에 숨겨진 이야기들!!


광활한 사막의 지평선 너머 마주하는 불교문화의 정수, 천불동 신화. 그리고 고대 한국과의 교류.




실크로드 어원의 탄생은?


19세기 독일 지리학자. 리히트호펜이 명명함.


중국의 옛수도 장안=서안을 기점으로 돈황에서 타클라마칸 사막을 지나



칼슈가르에서 이스탄불에 이르는 험난한 길임.


이 길 위에서 비단을 매개로 이뤄진 동서교역.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비단길 실크로드에요.


서안에서 돈황까지 2000km 임




돈황에서 카슈가르까지 타클라마칸 사막을 에돌아가는 길. 이 길도 2000km 임.


카슈가르에서 이스탄불까지 약 2400km 


후대의 연구로 범위가 더 확장된 실크로드? 실크로드 서역의 끝인 로마까지!



서안과의 교류로 이어진 동쪽 출발지인 신라 경주.




나아가 일본까지 뻗어 나간 교역로.


그중 핵심 지역을 답사할 예정임.



서안에서 하서주랑 돈황까지. 무려 2000km


오늘의 답사로 실크로드 동부지역임. 서안에서 돈황까지의 여정.




자연지도보다 도로지도에 익숙해서 특별히 준비한 지도가 있다고해요.



축소판 입체지도임.


실크로드는 물론 대한민국 지리까지 한눈에 볼수 있음.


첫번째 여정인 실크로드의 출발점, 서안.


옛이름이 장안이에요. 


장안의 화제라는 말 들어보셨죠?? 세계 4대 도시 장안에서 떠돌 정도로 유명한 이야기라는 뜻이에요.


서안의 대표 유적지는 진시황릉이에요. 진시황 병마용.




생김새가 각기 다른 팔천명의 조각상은 진시황의 병사를 본떠 만들었다고 전해진다고해요.




서안 개원문 앞에 있는 조각상이 실크로드 출발점의 상징이에요.


" 소그드 상인" 덥수룩한 수염을 가짐.


소그드인은? 중앙아시아 이란계 민족임. 실크로드를 누빈 최고의 중개무역상으로 활약함.



동서양 문명을 연결하는 실크로드의 출발점인 서안.


이어서 두번째  랜선 탐방로는?



서안에서 반나절 걸려 도착한 맥적산 석굴.




보리가마를 쌓아 놓은 모양이라고해서 보리맥에 쌓을 적.


4세기에서 14세기 천여 년에 걸쳐. 약 200여개의 석굴을 조성.


7천 200여개의 불상이 존재한다고해요.



높이 142미터 거대한 암봉에 조성된 맥적산 석굴로



마애불: 자연의 암벽에 불상을 나타낸 것.


중국에 석굴사원이 많은 이유는? 실크로드를 따라 상인들뿐만 아니라 인도의 불교도 전파됐기 때문이에요.


불교가 전파된 길을 따라 만들어진 석굴사원.


석굴사원의 시초는 인도에요. 인도가 덥잖아요.  무더위를 피해 시원한 석굴을 조성.


불상, 불화등 굴속에 법당을 만들 놓은거에요. 



29개의 석굴로 구성된 인도의 아잔타 석굴사원.





사다리 잔에 길도.


절벽에 나무를 나란히 박고 그위에 널판을 깔아 만든 길이에요.


우리에겐 국토면적 70%가 산지라 산사가 익숙하잖아요. 반면 중국은 약 70%가 사막과 초원이에요.


모래가 뭉쳐저 굳어진 암석인 사암이 많아요.


덜 단단해 굴착이 쉬운 사암 절벽. 그런데 왜 그많은 석굴이 필요했을까?


석굴은 왕족과 상인들의 기부로 조성됨. 극락왕생의 염원.


봉헌하는 사람의 재력과 정성으로 각기 다른 석굴이 구현됨.




석굴마다 각기 다른 특색을 지닌 불상이 있어요.


맥적산 석굴의 대표 불상은?




수골청상으로 빼어난 몸매에 해맑은 인상의 얼굴



제133굴 사미승상.

중국 불교미술의 1차 전성기로 북위, 서위시대를 대표하는 양식임.




생동감 넘치는 옷 주름이 포인트임. 인도에는 없는 패션이에요.


더운날씨로 얇은 사리를 걸친 인도 불상. 중국 북부로 한파용 맞춤제작 의상인거같다고.


소박하면서도 진솔한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중국 초기 불교예술의 정수, 맥적산 석굴.



400km를 달려 도착한 곳. 병령사 석굴.



병령사까지 배를 타고 50분정도 이동을 해요.



황하가 흙탕물이잖아요.

황토가 가라앉으면 영롱한 푸른빛을 띠는 물임.




황토물이 유가협 인공호수 안으로 밀려들어 오면서 황토색과 푸른색이 극명하게 대비되어 빚어내는 황홀경.


유가협댐 선착장에서 병령사까지 배를 타고 거친 물살을 따라 이동.



물살을 타고 마주한 병령사 석굴.



약 200개의 석굴을 조성. 앞서본 맥적산 석굴과는 또 다른 특징이에요.


3분의 2이상이 당나라때 조성된 석굴로 당나라불상의 특징은?




가장크게 표정과 생김새가 달라진 불상.


시대에 따라 불교 미술양식도 변화를 해요.

맥적산 석굴 대표 불상은 5세기에서 6세기 북위시대로.



병령사 석굴 대표 불상은 7세기에서 8세기 당나라 시대임.


당나라 불상의 또다른 특징은 트리방가, 삼굴의 자세.


신을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표현하고자 한 자세임.



중국 불교미술 2차 전성기인 당나라 불상의 특징임.


육감, 근엄, 인간적임.


신상은 절대자의 모습이고 절대자는 시대마다 이상적인 인간상을 반영해요.

시대마다 인간상이 바뀌듯 불상의 모습도 그에 따라 변화함.


병령사 석굴의 하이라이트. 서역에서 건너온 불상?



기원전 326년  인도 간다라 지역을 점령한 알렉산더 대왕.


이후 그리스 헬리니즘 문화가 전파됨. 인체의 아름다움을 옷 주름으로 자연스럽게 표현한 그리스 미술 양식이에요.



중국식은?



물속에 들어갔다 나온듯,  인체와 옷자락을 사실적으로 묘사함.


중국 불교미술에 남아있는 동서 문명교류의 흔적들.


병령사에서 야간 열차를 타고 하서주랑으로 하서주랑은 황하의 서쪽으로 펼쳐져 있는 좁고 긴 평지에요.



1200km 에 이르는 협곡을 따라 이어진 기찻길이에요.



야간열차를 타고 도착한 네번째 목적지는 가욕관.


아름다울 가. 골 욕. 빗장 관.




만리장성 동쪽 끝의 관문인 산해관.



약 6000km 에요.


14세기 명나라때 세운 마지막 성곽임. 일종의 명나라 서쪽 국경선임.




드디오 돈황!


실크로드 최종목적지인 돈황.


실크로드 곳곳 만년설이 쌓인 산맥.



여름이면 녹아서 어디론가 흘러가는 그러다가 큰 호수가 생기고 땅을 파면 물이 샘솟는 지역.


오아시스의 도시가 돈황이에요. 약 18만명이 거주중임.


현재는 관광지로 각광받는 역사적 유적지에요.




실크로드의 관문으로 남로와 북로가 만나는 곳에 위치.


물이 있고 쉴곳도 있으니 게다가 상업도 발달함.



사막 속에서 화려하게 빛나던 도시.


돈황시에서 25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실크로드 대표 석굴사원. 막고굴.


막고굴 가기던에 꼭 들려야 하는 곳.


모래와 암반으로 이루어진 명사산.



발밑의 모래가 미끄러져 소리를 내는 것이 마치 우는 소리처럼 들린다하여 붙여진 이름.


명불허전!! 이름이 헛되게 울려 퍼지지 않다.





공부보다 여행이 더 좋은 사람은 주목해주세요.


막고굴보다 월아천을 추천한다고!




오아시스 도시의 생명줄인 월아천.




천년이상 모양을 유지하며 마르지 않은 물.

과거 도교 사원으로 세워진 곳으로 현재는 관광안내소로 탈바꿈함.


월아천에는 도교 막고굴에는 불교.




위대하고 성스러운 석굴.


없을 막, 높은고, 굴 굴.


돈황의 하이라이트인 막고굴. 천불동 신화의 탄생지에요.





천불동은 천년동안 천개의 석굴이 만들어졌다고해서 붙여진 이름에요.


366년 돈황에는 낙준이라는 승려가 있었어요. 명사산쪽에서 홀연히 금빛이 일어난 것을 보고

천불이 잇는게 아닐까 직감했다. 그래서 이곳에 석굴을 조영했다.


돈황문서 제 2551올 막고굴리 865


이것이 막고굴 탄생의 시작이에요. 이후 수도승들이 모여들면서 천개의 석굴을 조성.


자연 친화적 야외 박물관임.



현재는 492개만이 발굴돼 일반에 공개.


고대 한국도 꿈꿨던 석굴사원. 교류로 이어진 인도와 중국은 석굴사원 천지에요.


우리나라는 사암대신 화강암이 분포되어 있음.

 그래서 더욱 빛나는 석굴암의 가치.



목조건축물을 세우듯 돌을 일일이 깎아 바닥에서부터 쌓아 올린 구조로


그렇게 탄생한 세계 유일 인공 석굴의 위상.

석굴암만해도 1시간 강연 주제라고해요.


어릴때 대충보고왔는데 .. 알고봐야 그 위대함을 느낄수 있는거같아요.


막고굴 랜선 탐방.





막고굴 제 249굴로 서위시대에 조성된 석굴임 5세기.


벽 전체를 빼곡히 수놓은 벽화.


회반죽을 발라 그위에 채색을 함. 벽면을 보면?




검인빛의 얼굴에 거친 묘사.



인상파 대표화가인 마티스 화풍과 비슷하다고해요.


천여 년동안 잘 보존된 이유는? 프레스코처럼 점점 굳어지는 시멘트의 성질을 이용함.


모두 불상과 보살의 그림이에요.



천불이라고해서 불상을 수없이 배열한 조각이나 회화를 말해요.


천장을 보면?




뒤돌아보면서 활쏘는 사냥꾼 그림.




고대 한국과 중국, 문화교류의 흔적이에요.


막고굴 영상은 www.e-dunhuang.com 에서 보실수 있어요.


방금본게 작은 석굴임. 진짜는 이제부터.



막고굴 제 285굴로 서위시대에 조성된 석굴임 6세기.



고대 신화의 신선 세계를 표현한 천장.



화려함의 극치임.


아치의 원리에요.



아래가 넓고 위가 좁아지는 돔 형상의 복두형 천장임.



돔이 유지되려면 눌러주고 버텨주는 압력등 과학적인 토목기술이 필요해요.



막고굴의 하이라이트. 가장 큰 굴.


고대한국은 통일신라에서 고려로 넘어가던 시기임.


9세기말에서 10세기로 만들어진 석굴.




중심에 기둥을 세운 중심주굴.


360도 벽면을 가득 채운 벽화.




기둥으로 지지한 드넓은 석굴임.

중심주 벽을 보면




원래는 지혜의 상징인 문수보살이 있던 자리라고해요.



꼬리만 남기고 간 조각상 도둑.



아직까지도 행방이 묘연한 문수보살상.





막고굴 제 61굴 오대산도는 중국 산시성 오대산을 오가던 각국의 사신을 그린 벽화임.


7세기에서 10세기가 통일신라고 10세기에서 14세기가 고려에요.


두 나라가 공전하던 시기로 통일신라가 935년 멸망 고려가 918년 건국.



오대산도에 함께 그려진 신라와 고려 사신.


중국과의 교류가 활발했던 신라. 5명의 신라 사절단을 맞이하는 중국관리 2명




막고굴 벽화속 고대 한국인 인물상 40여점을 발견.


조우관은 삼국시대 벼슬아치들이 쓰던 관이에요.



삼국시대는 관모 좌우에 새의 깃털을 꽂아서 장식함.



고대 한국과 중국의 교류를 확인시켜주는 벽화임.


가장 인상 깊은 석굴은? 무조건 제 45굴이라고함.





당나라 대표 미인인 문수보살상.




당나라 특유의 사실저깅고 육감적인 아름다움으로 동양판 비너스라 불리는 제 45굴 보살상임.


석굴암 문수보살도 같은 자세에요.




앙슈망이라고해서 체중을 한쪽 다리에 싣고 몸을 자연스럽게 기울인 자세임.


한쪽 다리에 무게를 싣고 우아한 포즈를 짓고 있는 3명의 미인.


앙슈망에서 발전된 삼굴의 자세


동서양 문화 교감의 현장이에요. 천년의 역사를 품은 막고굴.


막고굴에 숨겨진 놀라운 이야기가 있어요. 돈황문서에 숨겨진 흥미진진한 스토리.


장소는 돈황 막고굴 제 16굴 그곳에 다락 같은 방이 있었는데..


놀이 3m 면적 2.8제곱미터. 그곳에서 발견된 두루마리 족자 3만점.


3세기에서 11세기 고문서들이에요.




불경뿐 아니라 다양한 학문을 집대성한 대백과사전 같은 사료임.


문서로된 타임머신임. 이후 돈황학이 탄생합니다.


돈황문서가 발견된 제 16굴 속으로~






서류 3만점을 넣은후 봉쇄함  벽화를 그려 벽으로 둔갑.


그러다가 1900년경 우연히 발견하게됨.


언뜻 지나치기 쉬운 좁은 입구로 들어가면




누가 발견했을까?

왜 이곳에 숨겨져 있었을까?


돈황문서 미스터리.


글씨도 확인 가능할 만큼 완벽히 보존됨.



최초로 발견한 인물은 자칭 도사인 왕원록임.



필사 전문가를 고용해 불경 복사본을 팔아 생계를 유지함.


그러던 어느날 벽을 등지고 불경을 베끼던 중 담배를 피운 필사전문가가 벽에 담배를 비벼 껐더니




소식을 전해들은 왕원록은 벽을 부수니 제 17굴이 나옴.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돈황문서.


탕구트족의 나라인 서하와 전쟁을 벌인 돈황. 

피난설1. 서하를 피해 급히 피난시킨 것?

그 증거가 돈황문서의 기록시기가 3세기에서 11세기에요.


11세기는 전쟁의 시작과 돈황문서 마지막 기록 시기가 일치함.


또다른 피난설은 불교를 배척한 이슬람 카라한 왕조.


2. 이슬람을 피해 급히 피난 시킨 것? 

최근 등장한 또 다른 학설.!!



완벽한 정리정돈을 해놓은게 아니냐. 함부로 버릴수없는 귀한 불경이기에요

그 대안을 공손하게 존경스럽게 넣어놓은게 아니냐고.



그렇다면 왜 폐기해야 했을까? 인쇄술 발달 전에는 손으로 필사를 했어요.

당시엔 지저분하게 느껴진 필사본.


인쇄술 발전으로 목판으로 깔끔하게 찍어낸 경전이 등장함. 필사본은 자연히 뒷전으로 되었고 그래서 보관된게 아닌가..?!


썰만 무성하고 진실은 모름.


까막눈 도사로 학문과 거리가 멀었던 왕원록은



그러던 어느날 중요한 문서임을 알게됨.



발견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된 상황.

돈황문서 발견후 정부에 보호를 요청한 왕원록.


불안한 정세로 힘이 빠진 청나라의 무관심에 결국 방치됨.

그때 소문을 듣고 몰려든 제국주의 탐험가들.




촛대에 관심을 왕원록. 촛대와 돈황문서를 물물교환을 함.


고고학에는 문외한이지만 지질학자였던 오브루체프. 오히려 손해봣다고 생각함.



8개 국어를 구사하는 엘리트 고고학자. 오렐 스타인.


돈황문서 3만점중 1만점을 구입함. 문서의 3분의 1을 단돈 130파운드에 약 20만원에 삼.


당시 왕원록과 돈황 탐험대가 비난받는 이유는 꺼내주는 문서만 판매함.




고문서 1만점만 마차 5대 싣고 영구으로 감.


10여종의 다양한 문자로 기록된 돈황문서. 무려 8개 국어능력자였지만 유일하게 중국어만 몰랐음.


문서는 지금 영국 브리티시 박물관에서 전시중이라고해요.


탐험에성공한 영웅이라고해서 오렐 스타인은 기사 작위까지 수여받음.


왕원록은 문서 판돈은 막고굴 수리비와 건축비에 사용했다고함.


이 모든것이 막고굴을 지키기 위해 한일이라고.



폴 펠리오는 무려 13개 국어 능력자임 게다가 수준급의 중국어를 구사함.


돈황 연구에 한 획을 그은 분이에요. 돈황에서 가장 먼저 한일은 막고굴 내부를 측량.

다양한 언어의 비문을 해석해서 기록함. 함께간 사진작가는 사진으로 기록.



그렇게 탄생한 것이 1920년대 출판한 최초의 막고굴 도록.



얼마나 꼼꼼히 측량했냐 하면 일련번호를 부여하고 조사하는 석굴마다 번호를 매김.


제1굴에서 제 171굴까지 현재도 사용중인 펠리오 넘버.


펠리오 방문 이후 훼손당한 막고굴. 1917년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고

적군 혁명지지파의 승리 후 중국으로 도망온 9백여명의 백군.


6개월넘게 막고굴을 은신처로 사용함.


당시 군인들이 벽에 낙서를 함.




펠리오의 기여도는 인정함!!

사교성도 남달랐던 펠리오는 친화력 갑임. 현지인 뺨치는 중국어 실력에 자유롭게 자행된 돈황문서 매매.



그 많은 양을 열흘 만에 검토를 함.



분류도 세분화해서 꼭 가져갈것. 필요없는 것,  있으면 좋은 것 으로 나눠놓음.


하루에 살펴봐야 하는 문서양이 2천점. 1분에 2개꼴로봄.


그렇게 선별한 5천점.

지금은 프랑스 파리 기메 박물관과 국립도서관에서 전시 중이라고해요.


펠리오가 엄선해간 5천점의 돈황문서중.


그중 우리와 관련있는 유물이 있어요!!





펠리오가 밝혀낸 왕오천축국전.


어딜봐도 표제도 저자의 흔적도없음.

약 6천자로 두루마리 한장의 글만 보고 알아낸 것.


처음엔 혜초의 국적은 모른채 공개함.

일본인 사학자 다카쿠스 준지로가 혜초는 신라의 승려라고 알려줌.




일본 종교인인 오타니 고즈이는 유명 불교 사찰의 문주임.

엄청난 부자로 사비로 돈황에 탐험대를 발견함.


돈황 탐험대를 꾸린 목적은? 일본 불교의 시초를 찾아서 1902년 오타니 1차 탐험대의 목적지로 인도를 감.

이후 젊은 승려 다치바나를 고용.


1908년 오타니 2차 탐험대의 목적지는 키질석굴, 투르판


마지막 도착지가 돈황임.



돈황문서 5백여점과 실크로드 유물 5천여점.


실크로드 유물은 오타니의 별장 니라쿠소에 보관. 재정문제로 곳곳에 팔려나간 오타니 컬렉션.





한반도의 광산 채굴권 획득을 위해 당시 조선 총독인 데라우치에게 오타니 컬렉션을 뇌물로 줌.


1916년 9월 10일 경복궁 수정전에서 열린 오타니 컬렉션 전시회.


해방후 국립중앙박물관이 자연스럽게 인수.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저신된 20여점의 돈황유물.


실크로드  유물 보유량이 세계 6번째에요.


어쩌다보니 실크로드 유물이 생긴셈? 그러면 유물을 다시 돌려줘야 할까요?


굉장히 어려운 문제라고해요. 어디로? 누구에게? 어떻게? 그리고 돌려주기 시작하면?


세계 박물관 질서가 흔들거리게 된다고.


대한민국 돈황 유물의 존재만이라도 기억해야해요.


전에없던 도보자의 등장.


미국 최초 동양 미술사 연구자인 랭던 워너.


불교문화의 꽃인 일본 아스카 문화를 집중연구함. 하버드대 부속 포그 박물관의 지원으로 중국탐사를 떠남.


랭던 워너가 훼손한 흔적을 찾아서.




벽화중 가장 아름다운 부분을 뜯어간 것.


시작은 돈황 벽화를 조사하기 위한 답사였는데 아름다운 벽화를 보자 욕심이 생김


처음엔 벽을 통째로 헐어내려 했으나 실패함. 인공벽이었다면 분리가 가능햇을거에요.

자연 석굴은 벽 전체가 한 덩어리죠.



이탈리아에서 개발한 특수 화학 용액을 사용.


강력접착제인 아교를 먹인 천을 벽화에 붙인 후 판박이 긁듯 그림을 떼어낸 것.





기막힌 방법으로 수십 점의 벽화를 떼어감.


1950년대 이후  벽화 복원 작업을 진행했지만  일부는 심하게 훼손되어 결국 파괴됨.



벽화뿐만 아니라 보살상에도 손을 뎀.





포그 박물관에 전시된 공양보살상.




양옆에 높여있던 공양보살상.


1940년 무렵 돈황 수호자들이 등장합니다. 돈황의 도보자에서 수호자로.



20세기 중국 미술사 최고의 화가로 꼽히는 장대천.

작품의 규모가 어마어마하다고해요.



중국의 명산을 장쾌한 산수화로 담아낸 작품임.



세계 10대 예술가로 꼽힌 천재 화가임.


1937년 중일 전쟁 발발 당시 항일을 주제로 한작품들을 전시함.



전시회에서 중국 교포들이 기부한 항일 성금을  항일전쟁 군비로 쾌척.


전시회를 마치고 그후 돈황으로 떠난 장대천.



2년 6개월동안 벽화 276폭을 모사.





임모를 통해 돈황 벽화의 우수성을 알리는데 일조함.


막바지 작업중 막고굴을 찾아온 또 다른 화가 상서홍.



막고굴에서 그림을 그리던 장대천과 마주한 상서홍.





1943년 장대천은 떠나고 상서홍이 돈황을 지키기 시작함.


실제 막고굴에서 40년의 생을 보낸 상서홍.


1930년대 파리에서 유학 중이었던 상서홍은


어느날 파리 고서점을 방문했다가 폴 펠리오의 돈황도록을 발견.


고국에 이렇게 아름다운곳이 ? 그길고 돈황행을 결심.


"살아도 돈황에서 살고 죽어도 돈황에서 죽겠다고함"




파리유학중에 결혼한 여인 조각가 진지수



막고굴에서 살다시피 한 상서홍.



그러던 어느날, 연구소에 나타난 젊고 잘생긴 남자.

둘이 염문설이 나돌기 시작하고. 막고굴에만 틀어박혀있던 상서홍.



500km 도망감.


뒤늦게 말을타고 아내를 쫓아감. 그만 말에서 떨어져 큰 부상을 입음.



신문에 저렇게 이혼 선언을 함.


아내가 떠난후 돈황 연구에 더욱 매진.



그리고 또한번의 위기.

문을 닫게된 상서홍이 이끌던 국립돈황예술연구소.



그때부터 작품을 팔아 돈황 연구에 투자를함.


상서홍의 희생으로 유지된 돈황문물연구소. 어찌보면 개인의 사명감으로 지켜낸 돈황 막고굴.


나라의 일을 개인이 해낸 건 정말 위대한 업적이에요.


돈황을 빼앗으려던 자와 이를 지키려고 노력한 사람들. 서로 다른 목적으로 돈황을 찾았지만


결국 이들 모두가 함께 꽃피운 실크로드의 보물인 돈황.


인류의 위대한 유산인 돈황 막고굴. 중국을 지나 우리나라에 오고 일본까지 가는.

동서불교문화의 집대성.


중국에 석굴이 있다면? 대한민국의 자랑인 산사.



무려 7곳이 등재되어 있음.


우리나라 산사의 아늑함은 다른나라에서 느끼기 어려운 정취임.


문화란 그 나라의 자연환경에 맞추어 구현된다.


한국에서만 볼수 있는 아름다운 풍경이죠. 다른 나라 문화를 봐야 내 나라 문화가 더 잘 보이는 법.

그래서 더큰 의미로 와 닿는 돈황 답사.




<출처: jtbc 차이나는클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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